투자회사 KKR 이야기 | 문 앞의 야만인들(브라이언 버로, 존 헬리어)

투자회사 KKR 이야기


| Contents

1. 헨리 크래비스

2. 조지 로버츠

3. LBO의 개념과 프로토타입

4. 투자회사 KKR의 출발

5. LBO와 정크본드의 만남




1. 헨리 크래비스

1980년대 중반, 투자회사 KKR의 헨리 크래비스는 그 당시 기준으로 450억 달러를 동원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연간 물가상승률 4% 기준으로 이 금액을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1,340억 달러, 원화로는 185조원에 달하는 거금입니다. 그는 월스트리트 내 인수 합병 분야의 정점에 있었고, 그의 자금력은 파키스탄이나 그리스의 GDP보다 규모가 컸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금융계 정상을 향해 달리도록 추동했을까요?

그의 아버지 레이먼드 크래비스는 19~20세기 전환기에 뉴저지 애틀랜틱시티로 이주한 영국 재단사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미국 남서부 지방으로 이주한 후 1920년대 주식 활황기에 부자가 되었지만 1929년 대공황기에 빈털털이가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뒤에는 석유 기술자가 되어 월스트리트의 금융회사들을 위해 석유 매장량을 측정하는 일을 했습니다.

크래비스는 왜소한 체구로 투쟁적인 학창 시기를 보냈습니다. 덩치 큰 아이들 사이에 껴서 미식축구를 한다거나 콘택트렌즈 오착용으로 시력이 불안정한 상황 하에 아르바이트 업무를 끝까지 완수하는 등 비범한 근성을 보였습니다. 그는 학업 능력이 출중하진 않아 학사 과정은 클레어몬트남자대학에서 재무학을 전공했습니다.

졸업 후 그는 월스트리트의 단기자금 운용사 '매디슨 펀드'에서 인턴으로 일했고, 1967년 컬럼비아 비즈니스스쿨에 들어가 학업과 일을 병행합니다. 매디슨 펀드는 '케이티 인더스트리스' 라는 작은 철도 회사를 매입했는데, 크래비스는 이 회사의 다각화 사업을 맡게 됩니다. 케이티가 점점 커지자 크래비스는 학교에서 같이 공부했던 친구의 아버지를 사장으로 앉히는데, 두 사람은 케이티를 키워 막대한 이익을 남기고 매각하는데 성공합니다. 이 당시 25살이던 크래비스는 '패허티 앤드 스워트우드' 라는 회사로 자리를 옮겨 벤처캐피털을 운용하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1년만에 다시 회사에서 나옵니다. 백수가 된 그는 외사촌 조지 로버츠를 찾아가 도움을 구합니다.

1960년대의 조지 로버츠(좌), 헨리 크래비스(우) , 자료 : archievement.org


2. 조지 로버츠

조지 로버츠는 휴스턴에서 성장했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크래비스의 어머니는 남매 지간이었고, 크래비스의 외할아벚지는 러시아에서 살던 유대인이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1890년대말 차르의 군대와 맞서 싸우는 대신 미국으로 이주하는 삶을 선택합니다. 그의 아들 루이스 로버츠는 휴스턴에서 석유 사업에 종사했고, 당시 10대 소년이던 조지 로버츠에게 자기 사업을 하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조지 로버츠는 크래비스보다 한 해 먼저 클레어몬트대학교에 입학했고, 21살 때 크래비스의 아버지로부터 월스트리트의 대형 투자은행 베어스턴스에서 여름방학 동안 일할 수 있는 자리를 소개받습니다. 여기서 그가 열심히 일하던 모습을 마음에 들어한 사람이 기업대출 부서 책임자 제롬 콜버그였습니다. 이후 로버츠는 캘리포니아 헤이스팅스대학교의 로스쿨을 마친 뒤 콜버그의 부하 직원으로 취직하게 됩니다.

뉴욕에서 일하던 로버츠는 캘리포니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 샌프란시스코 지사로 자리를 옮기게 되고, 이 때 자기 후임으로 사촌인 헨리 크래비스를 추천합니다. 크래비스의 새로운 상사 제롬 콜버그는 44살의 가정적인 인물로, 스워스모어대학교와 하버드 비즈니스스쿨을 졸업했습니다. 콜버그는 일상업무인 기업대출 이외에 수익성 높은 사업을 따로 개발해두고 있었는데, 이는 주식담보차입거래(bootstrap deal)였습니다. 이 거래는 나중에 LBO(Leveraged Buy-Out)로 불리게 되는 것입니다. 

제롬 콜버그 , 자료 : 파이낸셜타임스


3. LBO의 개념과 프로토타입

원래 LBO는 전후에 자수성가한 경영인들이 점차 노인이 되어감에 따라 이들이 '케이크를 소유하는 동시에 케이크를 먹을 수 있도록' 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LBO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1) 투자자들의 돈을 끌어모으고 2) 인수 대상 회사를 담보로 하여 최대한의 대출을 받습니다. 그 다음 1) + 2)를 합쳐 그 회사를 사들입니다. 경영진은 자리를 유지하고 회사가 벌어들이는 돈으로 대출을 갚아나갑니다. 이 과정에서 경영합리화 과정을 거치므로 주식의 가치는 오르게 되고, 따라서 1)의 투자자들은 시세 차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노인이 된 경영인들은 LBO 과정에 협력하는 대가로 상당 수준의 지분을 얻을 수 있으며 경영진의 자리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

1960년대에 덩치를 키우던 기업들이 1970년대 들어 주식 시장이 주춤하자 탄탄한 자회사들을 팔기 시작합니다. 이 회사들은 미래 수익의 가시성과 현금흐름이 뛰어났고, 따라서 LBO 과정에서 발생한 대출금을 갚아나가는데 유리했기 때문에 콜버그는 이들 회사들을 사들여 사업을 확장했습니다. 콜버그는 인수한 회사의 비용 지출을 가능한 줄이고 불필요한 사업은 매각하여 부채를 갚았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경영진에 스톡옵션을 부여하여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독려했습니다. 이렇게 경영 효율화를 거친 회사는 나중에 비싼 값에 매각할 수 있었습니다.


4. 투자회사 KKR의 출발

1973년, 3년간 교육을 받은 크래비스는 독자적으로 거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회사 인수에 열심이다 보니 콜버그, 크래비스, 로버츠의 소속사 베어스턴스에서 맡고 있던 본업인 기업대출은 뒷전이 되었고, 사장인 샐림 '사이' 루이스를 비롯한 여러 직원들은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베어스턴스 사장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에 대한 직원들의 평가는 이렇습니다.

"사이는 전설이었죠. 전설적일 정도로 까다로웠다는 뜻입니다."

사장인 루이스는 증권 트레이더 일도 함께 했는데 단기 수익을 노리기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비록 건당 수익은 적어도 거래는 몇 초안에 끝났습니다. 그에 비해 콜버그의 방식은 3~5년이 걸리니 베어스턴스의 문화로 볼 때 그 시간은 영원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루이스는 콜버그의 방식이 마음에 안들었고, 몇몇 거래가 잘 안되자 다툼을 벌이기도 합니다. 결국 콜버그, 크래비스, 로버츠는 회사를 나오게 됩니다. 콜버그의 밑천은 500만 달러 정도 였습니다. 루이스는 이들이 인수한 회사의 이사회를 장악하는 등 훼방을 놓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KKR은 경영권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콜버그, 크래비스는 뉴욕을, 로버츠는 샌프란시스코를 무대로 삼아 일했습니다. 이들은 8명의 투자자들로부터 각각 5만 달러씩 받아 일반 경비를 충당했고, 모든 거래에서 발생하는 수익의 20%를 보수로, 투자 금액의 1%는 관리 수수료로 떼기로 정합니다. 이들은 LBO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부터 열심히 활동했고, 1977~1981년 기간 동안 여러 건의 거래를 성사시키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자료 : 위키피디아


5. LBO와 정크본드의 만남

KKR은 인수 대상 기업이 규모가 크다 해도 현금 흐름이 많다면 규모가 작은 회사처럼 쉽게 매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들은 판돈을 점점 더 크게 키워 1978년 3천만달러에서 1983년 10억달러의 자금을 조성하게 됩니다. 1983년 KKR의 연평균 수익률은 약 63% 였고, 세 사람이 가지고 있는 20%의 지분은 이들을 부자로 만들어줍니다.

LBO의 수익모델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LBO 시장의 규모는 급격히 팽창합니다. 1983~1988년 기간 중 LBO 총액은 1,819억 달러였는데, 1983년 이전의 6년 동안 총액은 110억 달러에 불과했습니다. 수많은 요인들이 LBO 시장의 분위기를 과열시켰습니다. 미국 세법은 배당금이 아니라 이자를 소득에서 공제하도록 허용함으로써 LBO를 조장하는 역할을 했습니다.(LBO로 차입금이 폭증해도 이자비용은 법인세 과세 대상에서 제외되어 절세 효과가 생긴다는 의미) 게다가 이 당시 유행했던 정크본드는 LBO에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LBO에 동원되는 자금의 60%는 은행에서 빌린 담보대출금 입니다. 전체의 10%만 인수자가 직접 투자합니다. 나머지 30%는 보통 대형 보험사에서 나오는데, 이들 회사에서도 투자안 검토 절차를 밟아야 되니 보통 여러 달의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중반에 등장한 투자회사 '드럭셀 버넘 램버트'는 위험도가 매우 높은 정크본드를 통해 이 30%의 자금을 순식간에 조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드럭셀의 마법사 마이클 밀컨은 정크본드의 황제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정크본드 덕분에 LBO 플레이어들은 민첩해졌습니다. 적대적 인수에 시달리던 회사의 경영진은 이들에게 백기사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LBO 플레이어들은 경영권을 보장해주면서 막대한 자금을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일종의 공생 관계가 형성됩니다. 사냥꾼은 사냥감을 노리고, 사냥감은 LBO 플레이어를 찾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모두 이득을 누렸고, 피해를 보는 쪽은 인수 대상 회사의 채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과 그 회사의 직원들이었습니다. 회사가 막대한 신규 차입금을 일으키면서 기존 채권 가격은 폭락하게 되고, 경영 효율화 과정에서 직원들의 일자리는 사라져갔습니다. 물론 월스트리트는 콧노래를 부를 뿐, 이들에게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금융시장이 아닌 실물 경제 현장에 있는 회사의 경영진들은 LBO를 월스트리트가 풀어놓은 대재앙으로 여겼습니다. '굿이어 타이어'의 경영자는 LBO가 "악마가 지옥에서 창안한 아이디어"라고 못박았습니다.

마이클 밀켄 , 자료 : CN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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