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산염 왕 존 토머스 노스 | 오래된 우표 사라진 나라들, 비에른 베르예

| Contents

1. 초석의 쓰임새

2. 초석의 매장지와 초석전쟁

3. 초석 산업의 승자

4. 초석을 둘러싼 영국의 시위

5. 초석 수요 급감


Dall-E가 표현한 칠레 도시 이키케의 풍경


1. 초석의 쓰임새

'초석'이라는 광물은 동식물의 잔해가 분해되어 염분을 함유한 토양과 접촉할 때 만들어집니다. 초석은 중세 초기 중국에서 화약을 발명하면서 수요가 급증했습니다. 초석 75%, 황 10%, 석탄 15%를 갈아서 알코올을 넣어 반죽한 다음 얇게 펴서 말린 후 곱게 빻으면 화약이 되었습니다. 

1800년대 들어 초석의 쓰임새는 더 다양해지는데, 이는 초석이 거의 순수한 질소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질소는 인, 칼륨과 함께 비료의 주요 성분이죠. 그래서 유럽, 미국 등지의 대규모 농업에서 퇴비와 천연비료 대신 초석이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폭약은 새로운 기술을 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므로 농업이 초석의 전방산업이 된 것입니다.


2. 초석의 매장지와 초석전쟁

세계 최대의 초석 매장층은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에 있습니다. 매장층은 페루, 볼리비아, 칠레에 걸쳐있었으나 칠레 기업들만 채광에 참여하여 수익을 쓸어가고 있었습니다. 질투에 사로잡힌 페루와 볼리비아는 관련 세율을 더 높이고 채광업을 국유화하겠다고 경고했습니다. 칠레 입장에서는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처사죠.


1879년 칠레는 전쟁을 선포했고, 후에 이 전쟁은 '초석전쟁' 또는 '태평양전쟁' 으로 불립니다. 구식 머스킷총을 사용하던 페루, 볼리비아와 달리 칠레는 현대화된 군대를 보유하고 있어 전쟁은 1883년 칠레의 승리로 끝납니다. 페루와 볼리비아는 일부 영토를 칠레에게 내주어야 했는데, 특히 볼리비아는 해안에 접한 국토를 모두 잃고 내륙국이 되어버립니다. 바다에 접하는 영토가 없는 내륙국은 무역에 불리하기 때문에 대개의 경우 가난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3. 초석 산업의 승자

당시 칠레의 초석회사 주요 간부들은 이키케(Iquique)라는 도시에 살고 있었습니다. 원래 이키케는 페루의 땅이었으나, 초석전쟁으로 인해 1879년 11월 이미 칠레의 손아귀에 들어갑니다.

초석회사의 간부 중에는 영국인 존 토머스 노스(John Thomas North)도 있었습니다. 그는 빈털털이 신세로 1866년 이 부근에 들어왔지만 열심히 일을 하여 자기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초석전쟁이 터지면서 광산의 가치가 헐값으로 떨어졌고, 혼란 속에서 그는 광업, 해운업, 운송업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사업체를 사들입니다. 칠레가 아타카마 사막을 점령하자마자 회사들의 가격은 이전 수준을 회복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이상으로 더 오릅니다. 그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갑부가 됩니다.

존 토머스 노스 , 사진 : 위키피디아


4. 초석을 둘러싼 영국의 시위

1882년, 갑부가 된 노스는 영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흥청망청 돈을 써댔고, '질산염 왕(the Nitrate King)'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거금을 들여 호화주택, 경주마 등을 사들였고 호화로운 파티를 열어 영국 최상류층 인사들이 초대됩니다. 손님 중에는 랜돌프 처칠 경(윈스턴 처칠의 부친), 웨일스 공(후의 에드워드 7세)도 있었습니다.

1883년 초석전쟁이 끝나면서 칠레는 초석 매장지를 지리적으로 독점하게 됩니다. 그러나 채굴 수익 대부분은 외국인 투자자, 그 중에서도 존 토머스 노스에게 흘러가고 있었죠. 이에 당시 칠레 대통령 호세 마뉴엘 발마세다는 1888년 초석광산 국유화를 선언합니다. 그러나 노스는 이미 여기저기에 돈을 뿌려서 사전작업을 해두었고, 발마세다는 국내외의 저항에 부딪힙니다. 내전이 발발하고, 영국 해군이 항만을 봉쇄하였으며, 보수 진영도 발마세다의 반대측을 지원합니다. 전쟁에서 패한 발마세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어이없게도 존 토머스 노스는 그로부터 몇 년 뒤에 굴을 먹고 식중독으로 사망합니다. 그러나 나 여전히 칠레 수출의 75%는 영국을 통해 이루어졌고, 수출 품목의 대부분은 초석이었습니다.


5. 초석 수요 급감

20세기 초반, 유럽에서는 공기에서 저렴하게 질소를 추출하는 공정이 개발됩니다. 1920년대부터는 신 공정을 이용한 대량생산이 이루어졌지만, 칠레산 초석의 수요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들어서 초석 수요가 급감합니다. 결국은 초석의 수요가 신 공정에 대체된 것입니다.

덴마크 작가 카르스텐 옌센이 1990년대말 이키케의 광구를 방문했습니다. 폐허가 되어버린 산업 시설은 마치 공룡의 뼈와 같이 한때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마치 폼페이 유적과도 같은 산업주의의 잔해들이 주가 폭락과 상장 폐지의 화산재 속에 묻힌 채 버려져 있다."


* 출처 : 오래된 우표, 사라진 나라들 (2019, 비에른 베르예 저, 홍한결 역, 흐름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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