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석유 수출을 장악한 소수 | 얼굴 없는 중개자들, 하비에르 블라시 잭 파시

러시아 석유 수출을 장악한 소수


| Contents

1. 원자재 슈퍼사이클과 러시아 석유 수출

2. 머큐리아와 군보르에너지의 시작

3. 러시아 석유를 중국에 공급한 머큐리아

4. 러시아 석유를 전세계에 공급한 군보르에너지

5. 66억 달러는 6명의 호주머니 속으로


Dall-E가 묘사한 유조선 원유 선적 풍경 


1. 원자재 슈퍼사이클과 러시아 석유 수출


중국을 비롯한 이머징 마켓의 원자재 수요 폭발로 2003년 하반기부터 원자재 슈퍼사이클이 시작됩니다. 그 이전 20년 가까이 국제 유가가 약세를 벗어나지 못해 그동안 유전, 송유관, 정유시설 투자가 극히 적었던 관계로 석유 산업은 이미 생산능력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린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공급량을 늘려도 급증하는 수요를 충족하는데 역부족이었죠. 2004년 세계 석유 수요는 1978년 이래 최대 증가폭을 기록했고 유가는 걸프전쟁 이후 처음으로 배럴당 40달러를 돌파하더니 사상 처음으로 50달러 고지에 올랐습니다.

많은 점에서 이 현상은 1970년대의 속편이었습니다. OPEC이 권력을 다시 장악하자 많은 석유 소비국 정치인들은 불안에 떨었습니다. 석유 가격은 언론의 주요 소재가 되었고 석유 고갈에 대한 종말론적 경고가 잇따랐습니다. 반면 원자재 중개업체 입장에서 석유 쟁탈전은 시장의 급속한 팽창을 의미했습니다. 중국 수요 증가는 세계 물동량 증가를 이끌었고, 2000~2008년 사이 세계 석유 무역량은 27% 가량 증가했습니다. 이 시기 원자재 중개업체들은 산유국 통치자의 금고를 오일머니로 채워주는 능력을 앞세워 통치자들과 동맹 관계를 맺습니다. 정치적 긴장이 고조된 러시아는 석유 구매를 보장하는 우호 세력이 필요했고, 따라서 원자재 중개업체들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 석유를 외부로 수출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대표적인 업체는 머큐리아군보르에너지 입니다. 이 둘은 데이비드가 트랜스월드를 세계적인 알루미늄 업체로 키울 때와 비슷한 시기에 출발했으나 본격적인 성공은 2000년대에 시작되었습니다. 이들 두 업체는 러시아 석유 수출을 통해 크렘린 궁의 금고에 달러를 채워주며 젊은 푸틴이 국제사회에서 더욱 대담해질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이미지 출처 : 양사 홈페이지


2. 머큐리아와 군보르에너지의 시작


머큐리아는 구 소련 출신 음악가 뱌체슬라프 스몰로코프스키(Wiaczeslaw Smolokowski), 그레고리 얀킬레비치(Gregory Jankilevitsch)가 우연한 기회로 석유 중개를 맡게 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때는 1990년대, 그들은 식당과 클럽에서 연주를 하다가 폴란드로 이주하여 가전제품 매매 등을 업으로 하는 작은 사업체를 운영했습니다. 어느 날 시베리아에 사는 한 고객이 자기한테 수출면허증이 있다면서 석유 중개를 권유해옵니다. 수출면허증은 희귀한 자격이었고, 두 사람은 망설이다가 이 제안을 받아들여 J&S 라는 회사를 설립합니다.

J&S는 폴란드에서 경영난을 겪던 정유 공장과 계약을 맺어 드루즈바 송유관을 통해 폴란드로 운송되는 러시아산 석유의 주요 화주가 됩니다. 1990년대 중반 J&S는 폴란드 원유 공급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덩치가 커집니다. 이들은 러시아 공급자와 폴란드 수요자의 거래 조건을 "무조건적으로" 맞추어주면서 세력을 확장하였습니다. J&S는 훗날 사명을 머큐리아로 개명합니다.


사진 : 드루즈바 송유관 ,  로이터


군보르에너지는 1990년대, 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전기 엔지니어로 일하던 30대의 겐나디 티모셴코(Gennady Timchenko)가 친구의 권유로 석유 중개를 맡게 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티모셴코의 동업자는 에스토니아를 거쳐 러시아산 석유 정제품을 수출하던 스웨덴 출신 퇴른크비스트 였습니다. 이들 둘은 라이벌이었으나 서로 힘을 합쳐 군보르 에너지를 설립합니다. 후에 군보르에너지의 일부 파트가 퇴른크비스트와 사이가 틀어졌을 때 티모셴코는 그들을 쫓아내고 2000년에 새로운 회사 군보르 인터내셔널을 설립합니다.


3. 러시아 석유를 중국에 공급한 머큐리아


머큐리아와 군보르에너지가 본격적으로 돈을 벌어들인 것은 원자재 슈퍼사이클 시기를 만나면서부터 입니다. 그 때는 석유 수요를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던 시기였고, 때마침 러시아 석유 생산량이 한창 증가하던 터라 일이 잘 풀리게 됩니다. 1999~2005년 러시아 석유 생산량은 50% 이상 성장했고, 수출량도 급증합니다. 올리가르히는 러시아 석유 산업의 지배력이 자기 손아귀에 들어왔다는 확신이 서자 외형 확장을 위해 수출에 더욱 매진하게 됩니다. 러시아의 새 대통령 푸틴은 석유가 곧 돈이자 권력임을 깨달았고, 이에 푸틴 정부는 석유 부문에 대한 통제력 강화를 위해 노력합니다. 이 움직임에 맞춰 머큐리아와 군보르에너지는 러시아 석유 수출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머큐리아는 러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면서 러시아에 오일머니를 주입했습니다. 2000년대초 러시아의 석유 생산량이 증가하자 J&S는 폴란드를 너머 다른 국가에도 본격적인 수출을 시도합니다. 시베리아에서 발트해 연안 항구도시 그단스크까지 석유를 운송한 다음 유조선에 실어 전세계로 수출하는 방식이었죠. 




그러나 현재 규모로 전세계적 석유 중개를 수행하기 벅차다고 판단한 이들은 마르코 두난드(Marco Dunand)와 다니얼 예기(Daniel Jaeggi)에게 도움을 구합니다. 이 둘은 유명한 원자재 중개업자였고, 2004년 예기와 두난드는 J&S와 합의하여 J&S 홀딩스를 설립합니다. J&S 홀딩스에서 창업자 스몰로코프스키와 얀킬레비치는 자신들의 지분을 점진적으로 줄이기로 하고, 두난드와 예기는 경영권을 행사하기로 합니다. 같은 해, J&S 홀딩스는 사명을 머큐리아로 바꿉니다. 머큐리아는 그단스크를 거쳐 러시아산 석유를 중국으로 운송합니다. 그들이 개척한 이 교역로는 향후 몇 년에 걸쳐 다른 업체도 참여하면서 중요성이 더욱 커졌습니다.

머큐리아는 성장을 거듭하여 2009년 한 해 동안 4.5억불의 순이익을 거두었으며, 2007~2018년 기간 동안 이들의 총 누적이익은 39억 달러에 이릅니다. 머큐리아의 창업자들은 약속대로 지분을 줄였고, 그 지분은 중국의 공기업 중국화공집단공사가 차지하게 됩니다.


4. 러시아 석유를 전세계에 공급한 군보르에너지


군보르에너지는 정치적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러시아 석유 수출원 역할을 맡게 됩니다. 티모셴코와 퇴른크비스트는 오래 전부터 러시아 주요 인사와 관계를 쌓는데 많은 공을 들였고, 그 중 한 명인 푸틴이 1999년말부터 러시아 대통령 직을 맡게 됩니다. 푸틴과 처음 거래한 것은 1990년대 초반으로, 당시 푸틴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외경제관계위원장이었습니다. 1998년 티모셴코를 비롯한 몇몇이 유도 클럽을 후원하며 푸틴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하기도 합니다. 유도는 푸틴의 취미이자 장기였죠. 푸틴과 티모셴코의 유착 관계를 두고 떠도는 소문이 많았지만, 2014년 푸틴이 티모셴코에 대해 "내 최측근이자 친구 중 하나"라고 당당히 밝히면서 논란은 끝나게 됩니다.


사진 : 겐나디 티모셴코 ,  로이터


푸틴을 비롯한 러시아 국민들은 올리가르히에 대한 반감이 컸습니다. 러시아가 힘이 없던 1990년대에 국내의 천연자원을 터무니없는 헐값에 차지한 그들의 사업 방식에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가 시작된 후 푸틴은 올리가르히에게 암묵적 거래를 제안합니다. 그들이 천연자원을 차지하게 된 계약을 무효화하지 않는 대신 정치판에 얼씬거리지 말라는 것이었죠. 여기에 푸틴의 강력한 정적 미하일 호도르콥스키(Mikhail Khodorkovsky)가 있었습니다. 그는 석유업체 유코스의 소유주로, 2003년 40살 나이에 러시아 최고 갑부가 됩니다.

호도르콥스키는 1980년대 후반 구 소련이 민간기업 설립을 허용하자마자 메나테프 라는 협동조합을 세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나테프를 은행으로 탈바꿈시킵니다. 메나테프는 급성장하여 러시아 최대 민간기업 중 하나가 되고, 호도르콥스키는 러시아 정부 인맥을 두텁게 쌓아둡니다. 1995년, 옐친 정부가 국영기업의 정부 지분을 양도하는 조건으로 금융기관 대출을 받는 일종의 '출자전환' 프로그램을 시작하자 호도르콥스키는 약 3억 달러로 유코스의 지배 지분을 확보합니다. 10년 후 유코스의 시장가치는 200억 달러에 달했으니 기회를 확실하게 잡은 셈입니다.

유코스는 푸틴과 그 측근들이 올리가르히에게 품었던 적개심의 결정체 같은 곳이었습니다. 유코스는 역외회사와 세율이 낮은 경제특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세금을 회피했고, 러시아 정부에는 가장 노골적인 로비를 하는 회사였습니다. 게다가 호도르콥스키는 정계 진출에 뜻을 내비치면서 유코스 지분을 매각하기 위해 엑손모빌, 쉐브론 같은 미국 기업과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유코스와 쉐브론은 합병 직전 단계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2003년 10월 25일, 호도르콥스키는 러시아 특수부대원에게 체포되어 조세 포탈, 횡령 등의 혐의로 10년간 정치범 수용소에 갇혔습니다. 1년 후 유코스는 국영 석유업체 로스네프트로 넘어갑니다.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사건은 올리가르히에 대한 푸틴의 경고였습니다. 어떤 올리가르히도 크렘린 궁보다 강력해지지 말 것, 개인적인 부는 푸틴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 추구할 것, 러시아의 천연자원은 러시아의 소유라는 것이었습니다. 유코스의 기존 주주들은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이 소송은 수년에 걸쳐 진행됩니다.

유코스 사태로 군보르에너지는 로스네프트로부터 석유 수출을 제안받습니다. 정부가 유코스의 유전을 압류하긴 했으나 로스네프트에겐 수출 담당 조직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유코스의 유전에서 생산되는 원유를 팔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죠. 군보르에너지는 원유 거래 경험이 거의 없었고, 석유 정제품을 주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퇴른크비스트는 이 제안이 일생일대의 기회라는 점을 즉시 포착하여 "무슨 수를 써도 좋으니 지금 당자 BNP파리바에 연락해서 신용 한도를 받아내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머지 않아 군보르에너지는 러시아 석유의 최대 수출업체가 되고, 한창 잘될 때는 로스네프트의 해상 수출물량 60%를 담당하기도 합니다. 2008년, 유가가 배럴당 100다러를 돌파했던 시기 군보르에너지는 러시아 석유의 해상 수출물량의 30%를 담당했습니다.

군보르에너지의 2005~2009년 기간 중 연평균 이익은 3.5억 달러 가량이었고, 군보르에너지의 자산 가치는 2005년 2.5억 달러에서 2009년 14억 달러로 커집니다.


5. 66억 달러는 6명의 호주머니 속으로


2018년까지 약 10년간 머큐리아와 군보르에너지가 벌어들인 이익은 66억 달러입니다. 이 돈은 얀킬레비치, 스몰로프스키, 두난드, 예기, 티모셴코, 퇴른크비스트의 호주머니로 배분되었습니다. 2000년대 러시아의 석유 시장은 1990년대의 상황이 재탕되었습니다. 물론 1990년대와는 달리 체제 붕괴의 혼란이 부의 원천이 되진 않았습니다. 중국과 여타 이머징 마켓의 석유 수요 급증에 맞춰 러시아 석유 생산량이 증가해준 덕분이었죠. 그러나 그 수혜는 소수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유가 강세는 산유국의 독재자에게 칼자루를 쥐어줬고, 그들의 석유를 시장에 공급하는 원자재 중개업체는 돈을 벌었습니다.


다니엘 예기(좌), 마르코 두난드(우),  출처 : 머큐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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