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도 꺾을 수 없었던 학습 의지 | 중국인 이야기, 김명호

| 들어가며

반도체, 전기차, 태양광 등 중국에 대한 전방위적 압박이 수년간 지속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차질이 생기고 있지만 중국은 계속 전진합니다. 반도체 관련 무역제재 초기에 압박 조치으로 인해 중국의 자급자족이 더욱 빨라질 것이라는 우려가 꽤 있었는데, 현실화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중국이 레거시 반도체와 전기차에서 치고 올라오면 우리나라의 입지가 더욱 좁아질테니 반갑지 않은 소식입니다.

지난 세기 중국이 어떤 방식으로 역경을 이겨냈는지 엿볼 수 있는 이야기를 하나 정리해봅니다. 



전쟁도 꺾을 수 없었던 학습 의지


| Contents

1. 전시 연합대학 설립

2. 창사에서 쿤밍까지 1,350km를 걸어간 대학 보행단

3. 노벨상 수상자까지 배출한 연합대학

4. 결론 : 잊혀지지 않는 유산

 



1. 전시 연합대학 설립

1937년 7월 7일, 중국 동북부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이 베이징 교외에서 중국군과 충돌합니다. 일본군은 순식간에 톈진과 베이징을 압박하고, 중국군은 베이징에서 철수합니다. 중국 최초의 사립대학인 톈진의 난카이대학은 7월 29일, 31일 두 차례에 걸쳐 일본군의 무자비한 폭격을 받아 치명적인 피해를 입습니다. 베이징대학은 일본 헌병대의 고문소가 되어 밤마다 비명소리가 흘러나오는 무시무시한 장소가 됩니다.

당시 중국은 공산당이 아닌 국민당이 통치하는 국가였습니다. 최고통치자 장제스는 "전시일수록 교육은 평소와 다름없어야 한다."는 전시 교육정책을 제시합니다. 정부는 70여개의 대학을 이전하기로 하는데, 국립인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 사립인 난카이대학도 후난성 창사로 이전하기로 합니다. 이들은 연합에 합의하고 1937년 11월 1일, 웨루서원에서 '국립창사임시대학'을 설립합니다. 교수 148명, 학생 1,452명 이었습니다.

그해 말 일본군은 수도 난징을 함락하여 끔찍한 일을 벌였고, 창사에는 공습을 퍼붓습니다. 임시 대학은 더 안전한 자리를 찾아 시난에 위치한 원난성 쿤밍으로 학교를 옮기기로 합니다. 쿤밍은 기후가 사철 온화하고 철도를 이용하면 해외 왕래가 수월하여 전시 교육장소로 적합했습니다. 다만 창사에서 멀다는 게 문제였죠.



2. 창사에서 쿤밍까지 1,350km를 걸어간 대학 보행단

1938년 2월 중순부터 이전이 시작되었고, 학생 875명이 지원했습니다. 남학생 244명과 교수 10여명은 쿤밍까지 걸어가는 보행단을 조직합니다. 보행단의 행군은 일본군의 폭격과 악천후 속에 이루어졌습니다. 후일 중국의 대표적인 철학자 중 하나인 런지위는 이렇게 소회를 밝힙니다.

"상아탑을 나온 우리는 처음으로 조국이 무엇인지를 인식했다. 얼마나 빈곤하고 큰 나라인지를 그제야 알았다. 평소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한다고 여겼던 아편장수나 하층민도 나라 잃은 백성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침략자에 대한 그들의 분노와 불복종의 기세는 우리를 교육시켰다. 우리는 이들을 아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들이 있기에 중국은 망하지 않는다."

사진 : 철학자 런지위, cpcnews.cn

보행단은 68일에 걸친 3,500리(약 1,350km)의 장정을 거쳐 쿤밍에 도착합니다. 

1938년 8월, 국립 시난연합대학이 정식으로 설립됩니다. 전란 속에 태어나 8년간 존속된 학부였습니다. 시난연합대학은 교장이 없었고, 3개 대학의 교장이 상임위원이었습니다. 베이징대 교장 장멍린, 난카이대 교장 장보링은 전시 수도 충칭에 상주하다시피 했습니다. 칭화대 총장 메이이치 혼자서 대학을 끌고 나갔으므로 그가 교장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그는 폭넓은 교육을 실행하는 통재교육을 방향으로 삼았고, 학습환경 보장 외에 어떤 것도 정부에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간섭도 허용하지 않았죠.

사진 : 칭화대 총장 메이이치, epochtimes.com

3. 노벨상 수상자까지 배출한 연합대학

시난연합대학의 시설은 좋지 않았습니다. 판자집에 양철지붕을 덮은 기숙사, 교실, 실험실 등 82채 건물을 1년에 걸쳐 지었습니다. 예산 부족으로 창문에 유리를 끼지 못했습니다.

교수들의 생활도 빈곤했습니다. 전각의 명인이었던 교수 원이둬는 밤마다 도장을 파서 팔았고, 교장 메이이치의 부인 한융화는 빵을 만들어 쿤밍의 유서 깊은 빵집 관성위안에 납품했습니다. 그녀는 그 빵에 '딩성가오' 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 빵은 쿤밍의 명물이 됩니다. 중국 핵무기 개발에 업적을 남긴 화학과 교수 자오중야오는 빨래비누를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사진 : 중국 핵무기 개발에 참여한 화학과 교수 자오중야오, cpcnews.cn

이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대학의 자율이 보장되는지, 학문과 사상의 자유가 침해받지 않는지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시난연합대학은 전시에 기라성 같은 인재들을 배출합니다. 8년간 배출한 3,300여명의 졸업생 중에는 양전닝, 리정다오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주광야, 덩자셴 등 세계적인 과학자, 왕쩡치, 허치팡, 런지위 등 뛰어난 작가와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1949년 중앙연구원 원사 27명, 중국과학원 원사 154명, 공정원 원사 12명 전원이 시난연합대학 출신이거나 교편을 잡았던 이들이었습니다.

1938년 9월, 일본군의 1차 쿤밍 공습  이후 1940~1943년까지 3년간은 공습이 빈번했습니다. 수업 도중 공습 경보가 울리면 모두 뒷산으로 도망가야 했고, 경보가 긴 날은 산 속에서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진웨린은 공습을 피하던 중 67만자에 달하는 '지식론' 원고를 분실합니다. 별 수 없이 다시 썼습니다. 물리학자 교수 우다유는 공습을 피해 교외로 이사한 후 마차를 얻어타고 학교에 오다가 굴러떨어져 뇌진탕으로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다 깨어나면 다시 토굴 속의 실험실 속에서 수업을 강행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양전닝, 리정다오는 이렇게 공부해서 1957년에 노벨물리학상을 공동수상 했습니다.


4. 결론 : 잊혀지지 않는 유산

시난연합대학이 운영되던 시기는 아직 100년도 안되었습니다. 양전닝, 리정다오와 같은 인물은 아직도 생존하고 있으며, 그들로부터 교육 받은 수많은 제자들이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물려받은 유산은 다시 세대를 넘어 전승되고 있습니다.

교육내용 뿐 아니라 의지 또한 후대에 전해지는 것일까요. 중국은 현 시대를 나름의 방식으로 견뎌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6.25. 세대의 기억은 시기적으로 중국과 공유되는 부분이죠. MZ 세대로 불리는 현 세대들이 과거의 유산을 잘 이어갈 수 있을까요? 어쩌면 비웃음이 먼저 나올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도 위기가 닥치면 우리도 몰랐던 힘을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의 모습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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