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ary
ㅁ 프랭크 홈즈 라는 인물이 1923년 아라비아 지역 석유이권 획득
ㅇ 그 당시 BP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석유가 나올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단언
ㅁ 자금문제, 적선협정 등 이슈로 소칼(현 쉐브론)에게 공이 넘어감
ㅁ 소칼은 사우디 정부와 협상하여 개발권 + 60년간 석유이권 획득
ㅁ 3년간 현재가치 기준 1.3조원을 투입해 시추 성공
사우디아라비아 석유 시추 이야기
| 들어가며
대왕고래 프로젝트에 대한 정치적 공세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석유/가스 시추는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아 오래 전부터 할 때마다 논란이 많은 사업이었습니다. 다니엘 예긴의 저작 '황금의 샘'에는 다양한 시추 사례가 소개되고 있는데요. 그 중에서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를 발견하는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현재 국내 상황에 참고가 되는 부분이 있어 정리해봅니다.
| Contents
1. 프랭크 홈스의 아라비아 석유이권 획득
2. 걸프오일과 소칼의 아라비아 진입
3. 소칼의 사우디아라비아 석유개발 참여
4. 3년에 걸친 시추 작업
5. 시사점 : 정치적 접근을 배제해야 하는 시추 사업
1. 프랭크 홈스의 아라비아 석유이권 획득
전후 이스턴&제너럴 신디케이트 라는 회사의 직원이 된 프랭크 홈스는 1920년 아덴(예멘의 항구 도시)에 약국을 개설하는 임무를 맡게 되는데, 아라비아 해안 인근에 오면서 그는 이곳이 엄청난 석유 공급지가 될 것이라 확신하여 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합니다. 대인관계에 능숙했던 그는 아라비아 해안의 몰락한 군주들을 차례로 만나며 그들에게 석유에서 나올 금전적 이득을 약속하면서 자신의 몫으로 석유 이권을 챙깁니다.
그는 아라비아 해에 위치한 바레인 섬에 석유사업 본부를 설치합니다. 석유 분출이 있었다는 보고를 접해서 이 곳에 온 것인데, 막상 족장들은 석유보다는 부족했던 물에 관심을 보입니다. 그래서 홈스는 물을 찾기 위해 시추를 했고, 그것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입니다. 족장들은 물을 찾아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1925년 약속했던 석유 이권을 그에게 넘깁니다.
홈스는 1923년 사우디아라비아 동부의 알 하사 지역, 사우디-쿠웨이트 공동 관리 중립지대의 석유 이권도 획득합니다. 그의 활동은 BP의 이란 사업에 방해가 되고 있었습니다. BP는 아라비아에는 석유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1926년 BP의 중역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석유가 나올 가능성이 전혀 없다" 라고 단언한 바 있습니다.
홈스와 이스턴&제너럴 신디케이트는 자신들의 확신을 입증하기 위해 스위스 지질학자를 고용하여 아라비아 동부를 조사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 지역에는 석유 시추를 위한 결정적 단서가 없으므로 탐사는 단지 도박에 불과하다' 라는 보고서를 작성해줍니다. 비관적인 보고서가 런던에 유포되자 자금 조달은 더욱 어려워지죠.
1926년 회사는 재정난에 빠져 그는 모든 석유 이권을 BP에게 팔려고 하지만 거절 당합니다. 결국 이 시기에 아라비아에서는 석유가 생산되지 못합니다.
2. 걸프오일과 소칼의 아라비아 진입
홈스는 영국에서 자금조달 하는 것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넘어갑니다. 우선 뉴저지 스탠더드오일(현재의 엑손모빌)에게 갔으나 거절 당합니다. 다행히 걸프오일(현재의 쉐브론)이 관심을 가지는데, 걸프오일은 당시 전 세계에 분산된 석유 생산 기지를 확보하는 중이었습니다. 1927년 걸프오일은 이스턴&제너럴이 가지고 있던 아라비아 지역의 석유 이권을 인수 받으면서 쿠웨이트 내의 이권을 확보하는데 홈스 일행을 참여시킵니다.
그런데 걸프오일은 1928년 적선협정에 서명하여 바레인, 사우디아라비아 사업을 추진할 수 없게 됩니다. 적선협정은 터키석유회사 설립에 참가하는 석유 회사들이 중동 지역에 붉은 선으로 표시한 지역 안에서는 혼자서 사업을 벌일 수 없다는 내용의 협정입니다. 협정으로 인해 걸프오일은 선 밖에 있는 쿠웨이트에서만 사업을 진행합니다.
그 대신 걸프오일은 적선협정에 참여하지 않은 소칼(캘리포니아 스탠더드 오일, 현 쉐브론, 참고로 소칼+걸프=쉐브론)에게 바레인의 석유 이권을 넘깁니다.
그러나 걸프오일, 소칼 양사 모두 영국이 아라비아 지역에 미국계 회사가 참여하는 것을 막아서는 바람에 난관에 봉착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영국은 독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바레인, 쿠웨이트를 포함한 그 지역 수장들과 체결한 협정 때문 입니다. 그 협정의 내용은, 석유개발은 영국 회사에 위임하고 페르시아 만 국가와의 대외관계는 영국 정부가 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영국은 바레인, 쿠웨이트 양국 모두 영국계 회사가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걸프오일, 소칼은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영국 정부와 협상을 시작했고, 1929년 영국은 미국계 회사가 영국 해군에게 신뢰할만한 석유 공급원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바레인에서의 이권을 인정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1931년 바레인에서 시추가 시작되었고, 1932년 페르시아 만의 아라비아 쪽 해안에서 석유가 발견됩니다. 생산량은 적었지만 이 부근에 석유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던 수많은 회사들이 큰 충격을 받습니다. 바레인은 외견상 지질 구조가 똑같은 아라비아 반도와 불과 20마일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3. 소칼의 사우디아라비아 석유개발 참여
한편, 1900년대 들어 약 30년에 걸쳐 2번째 사우디 왕국을 건설한 국왕 이븐 사우드는 재정난에 봉착해있던 1930년, 인도 정청 관리직 등을 맡은 바 있는 영국인 친구 잭 필비로부터 사우디아라비아 사막의 지하에 석유가 있을 것이라는 조언을 듣습니다. 그러나 바레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븐 사우드는 석유보다 지하수 탐사에 관심이 더 많았고, 필비는 그 일을 수행할 수 있을만한 미국인 찰스 크레인이라는 사람을 추천합니다. 그는 예맨 사업을 진행하느라 이집트의 카이로에 와있었거든요.
1931년 크레인은 사우디의 초청으로 제다에 방문하여 칼 트위첼이라는 미국인 광산 기술자가 수자원 개발을 진행할 수 있게 해주고, 개발비용도 본인이 부담하기로 합니다. 트위첼은 사막의 1,500마일을 탐사했지만 물은 없는 것 같다는 비관적인 견해를 내지만, 그 대신 동부 알-하사 지역에 석유가 묻혀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알려줍니다.
이븐 사우드는 원래 왕국 내 외국인 투자를 제한하고 있었으나 이를 완화하여 트위첼과 함께 미국 기업 유치와 자본 도입에 힘을 모읍니다. 트위첼은 소칼에게 알-하사의 상황에 대해 알려주고, 그는 소칼의 교섭단에 합류하여 소칼의 고문 변호사 로이드 해밀턴과 함께 1933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재무장관 압둘라 술레이만과 교섭에 들어갑니다.
그는 소칼, 이라크 석유회사(구 터키석유회사)의 경쟁구도 사이에서 협상을 진행하는데, 소칼 측은 이븐 사우드 국왕과 친분이 있는 잭 필비를 끌어들입니다. 그는 소칼로부터 지원금을 받는 대신 협상에 필요한 조언을 해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그 밖에도 협상 당사자들 사이에서 여러가지 정보를 조율하며 다양한 사업을 진행시킵니다. 1933년, 결국 협상은 타결되어 소칼이 60년간의 석유 이권을 가져가는 대신 사우디 정부에 적지 않은 대가를 지불합니다.
이라크 석유회사는 방어적인 입장에서 협상을 진행하다 실패한 셈인데, 사우디 정부와 다시 협상을 진행하여 1936년 서부 헤자즈의 석유 이권을 획득합니다. 계약조건은 소칼보다 훨씬 불리했고, 결과적으로 그 지역에서 한 방울의 석유도 얻지 못합니다.
4. 3년에 걸친 시추 작업
소칼은 사우디 석유 이권을 관리하기 위해 제다에 카속(캘리포니아-아라비안 스탠더드오일)을 설립합니다. 1933년, 미국인 지질탐사가 2명이 바레인에서 주바일로 넘어옵니다. 그들은 미리 봐두었던 담맘 지역에 방문하는데, 석유를 발견한 바레인의 지질구조와 똑같은 지형에서 25마일 떨어진 위치였습니다. 1934년 굴착이 시작되었으나 처음 6개의 유정은 모두 실패합니다.
그 후 수년간 더 많은 지질탐사가들이 도착하여 사막을 부채꼴 형태로 조사합니다. 이동할 때는 주로 낙타를 탔고, 10명의 경비원과 안내자를 대동했습니다. 낮에는 46도까지 기온이 올라갔고 밤에는 혹독하게 추웠습니다. 사막 한가운데로 들어가서는 물자 공급이 안되어 영양과 새를 잡아먹거나 베두인 유목민에게 바가지를 써가며 양 한 마리를 구입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신기술인 지진 관측과 항공 관측을 병행하여 유정의 실마리를 찾습니다. 한편, 소칼 본사의 경영진들은 그동안 지출된 경비 1천만달러(현재 원화가치로 약 1.2조원)를 전부 손실 처리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1937년이 되자 소칼의 해외생산 책임자는 상세 계획안을 제출하지 않는 한, 신규 사업은 착수하지 말라고 사우디로 전보를 보내옵니다. 위기에 처한 사우디 사업은 1938년, 담맘 지역 7호 시추정에서 대규모 석유가 발견됨으로써 분위기가 반전됩니다. 시추가 시작된 이래 3년 만의 일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독일, 일본, 이탈리아까지 사우디의 시추권을 얻기 위한 경쟁에 나섭니다. 그러나 1933년 협정의 부속 비밀문서에 따라 카속이 사우디 사업의 우선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규모 유정이 발견되면서 다란에서는 주거구역 개발 사업이 재빠르게 진행됩니다. 해안 선적기지로 선정된 항구인 라스타누라, 그리고 유전지대를 연결하는 파이프라인도 건설됩니다. 1939년, 이븐 사우드 국왕은 대규모 수행원과 함께 다란에 도착합니다. 그들은 석유를 처음으로 선적하기 위해 라스타누라 항에 입항한 소칼의 유조선 D.G.스코필드 호를 보러 온 것입니다. 국왕은 친히 밸브를 열었고, 이로써 사우디아라비아산 석유 수출이 시작됩니다.
5. 시사점 : 정치적 접근을 배제해야 하는 시추 사업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석유 꿀단지에서도 시추 성공에 3년이 걸렸습니다. 물론 그 당시는 거의 100년 전이라 기술 수준이 지금과 같을 수 없겠지만, 성공 확률이 낮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 등을 감안하면 대왕고래 프로젝트의 성공 확률과 비슷할 수도 있겠죠. 지금은 그 때보다 기술이 많이 발전했지만 포항 영일만 시추 성공률은 사우디아라비아 담맘 유정보다 (아마도) 낮을 테니까요.
대왕고래 프로젝트가 성공하기까지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필요할 것이고, 실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시추 사업은 1개 업체가 단독 진행을 해도 시행착오가 많은데 컨소시움 형태로 진행하면서 정치권의 공세까지 더해진다면 사업이 얼마나 더 힘들어질까요? 사업은 경제적 논리로만 접근하는 게 맞습니다. 음모론은 그만두고 기대값에 근거한 의사결정을 해야할 것입니다.
어쨌든 좋은 소식인데 걱정이 앞선다는 게 슬프군요. 모쪼록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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