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며
상하이 여행 중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에 가보았습니다. 재개발로 인하여 철거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문득 상하이 임시정부가 세워졌던 일제강점기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박시백 화백의 일제강점기 역사 만화 시리즈 "35년"(전 7권)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국사책을 이렇게 열심히 읽었던 적이 없었는데, 느낀 바가 있어 그런지 열독했습니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서 보이는 게 달랐습니다. 시대의 흐름보다 인물의 면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독립운동가는 좋은 사람, 친일파는 나쁜 사람 이라는 이분법이 도덕적으로는 당연히 올바른 이야기지요. 하지만 내가 저 시대를 살았다면 과연 끝까지 독립운동가로 남을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말과 행동의 간극이 지나온 세월만큼 커보였습니다.
독립운동가들도 각자 뜻하는 바가 달랐다는 점 또한 인상 깊었습니다. 그야말로 동상이몽 입니다. 독립 이후에 새로운 국가를 열고자 하는 사람이 있었던 반면, 과거 조선 시대로 돌아가고자 하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 글은 지금 보기엔 시대착오적인 인물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은, 의병장 유인석 선생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집념으로 지키고자 했던 과거의 이상
| Contents
1. 의병장 유인석, 그는 누구인가?
2. 과거 질서의 복원을 꿈꾸다
3. 신념을 지킨다는 것
1. 의병장 유인석, 그는 누구인가?
"35년"의 각주 부분에는 인명사전이 충실히 수록되어있습니다. 거기에 등장하는 유인석 선생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유인석(1842~1915)
유학자, 의병장, 위정척사 사상의 원류인 이항로 문하에서 수학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때는 개항반대운동을 전개했고, 1895년에는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8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이상설, 이범윤 등을 만나 1910년 6월 십삼도의군을 결성하고 도총재에 추대됐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상 수훈
인명사전에서는 비교적 간단한 설명으로 끝마치지만 1권에서 꽤 자주 등장하는 인물 입니다. 설명에 나오듯 단발령을 계기로 1896년(이 때 그는 이미 50대 입니다) 호좌창의진(湖左倡義陣) 이라는 의병대를 일으킵니다. 인원은 최대 4천여명에 달했다고 하며, 본인이 강원도 춘천 출생 임에도 불구, 충청도 영월, 제천, 충주 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했었습니다.
그러다 아관파천 이후 단발령이 취소되면서 의병 활동의 명분이 사라져 평안도로 이동, 서간도 지역으로 국경을 넘어갔다가 청나라의 제지로 의병대를 해산합니다. 1897년 고종이 유인석 선생을 용서한다고 사자를 보내오면서 다시 국내로 들어오나 몇 달 지내다가 다시 만주로 돌아가 의병 거점을 마련하는데 힘씁니다.
그 이후에도 큰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국내/외를 오가며 항일투쟁을 위한 활동을 이어가고, 1908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 조직화를 위해 노력합니다. 이후 일제는 러시아 정부에 연해주의 반일운동에 대해 항의하고, 러시아가 국내 독립지사를 탄압하자 유인석 선생도 1914년 서간도로 다시 이동하여 이듬해인 1915년 세상을 떠납니다.
2. 과거 질서의 복원을 꿈꾸다
단발령이 의병 활동의 계기가 되었다는 지점에서 유인석 선생의 사상이 드러나죠. 중화 사상의 연장선에서 조선을 명나라의 후예 정도로 해석하고 청나라는 오랑캐, 일본은 금수 정도로 여깁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 항일 투쟁을 했던 것은 대한민국 독립을 위한 게 아니라 조선을 과거의 질서로 되돌려놓기 위함이었습니다.
호좌창의진이 활동하던 당시에도 그는 계급론에 기반한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냅니다. 대부분의 의병이 양반이 아닌 평민이었음에도 불구, 평민 출신 의병장 김백선을 항명죄로 처형하면서 "평민 출신이 자기 분수를 모른다"는 발언을 하여 수많은 의병들의 이탈을 일으킨 게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일본을 물리치고 새로운 세상이 오길 원하던 사람들은 그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시켜줬습니다.
그러니 시대착오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죠. 그의 의병 활동이 대성공하여 일본이 순순히 물러났다 하더라도 조선이 과거의 왕도국가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시대 다수의 구시대 인물들도 이 정도 감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항일 투쟁을 하다 감옥에 가거나 하면서 역사의 뒷편으로 물러나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유인석 선생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50대 넘어 70대가 될 때까지 과거의 질서를 회복시키고 고종을 다시 옹립하기 위해 이 나라 저 나라 떠돌아다니는 게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탄압에 쫓기고 끝없는 실패가 반복되는 와중에 그가 지키고자 했던 이상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을까요?
3. 신념을 지킨다는 것
유인석 선생은 그 와중에도 집필한 저작이 꽤 있습니다. 읽어보진 못했지만, 책을 만들었다는 건 글을 많이 썼다는 것이고, 그 역시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내가 틀릴 수도 있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해보기 마련이죠. 그에게는 회의, 또는 후회의 시간이 없었을까요? 세월이 지남에 따라 주변에 자기와 같은 신념을 가진 사람이 점점 적어졌을 것이므로 그도 내심 불안한 마음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내가 지키고자 했던 것이 스러져가는 것만으로도 마음 아픈데, 그게 실은 잘못된 것이었을 수도 있다면 얼마나 허망할까요? 이 지점에서 유인석 선생이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분의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자신의 이상을 향해 끝까지 나아간 집념은 우러러 볼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도 주식 시장에서 끝없이 흔들리고 있는 제 마음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나 자신을 믿어야 할텐데 왜 그러지 못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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