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에즈 운하와 제3차 중동전쟁이 낳은 VLCC | 황금의 샘, 다니엘 예긴

| Summary


ㅁ 수에즈 운하는 중동과 유럽을 이어주는 석유 공급로

ㅁ 양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주의 분위기 하에 수에즈 운하 이권 분쟁 발생

ㅁ 이집트 나세르 정권에 수에즈 운하를 빼앗긴 영국, 프랑스는 군사작전 돌입

ㅁ 영프 연합군은 수에즈 운하를 점거하나 이미 운하는 봉쇄 당함

  ㅇ 중동 석유 공급이 끊기고 군사작전에 분노한 미국도 석유 공급을 끊어버림

ㅁ 석유 부족을 우려한 영프는 미국의 요구대로 수에즈 운하를 이집트에 돌려줌

ㅁ 상황은 종료되었으나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 항로의 중요성이 부각됨

  ㅇ 운항거리가 길어져 초대형 탱커 필요성 대두  ▷ 일본이 VLCC 건조 시작




수에즈 운하와 제3차 중동전쟁이 낳은 VLCC



| 들어가며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욤 키푸르 전쟁) 이후 제5차 중동전쟁으로 기록될 이스라엘-하마스 분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 입니다. 아랍권에서 이스라엘은 공공의 적이다보니 친이란 후티 반군까지 개입하여 수에즈 운하를 오가는 선박을 공격하는 등 무력시위를 벌이고 있죠. 지금 시대는 여러모로 1970년대를 연상케 하는 측면이 있어 인상깊게 읽은 옛날 이야기를 정리해봅니다. VLCC도 수에즈 운하 봉쇄 작전의 결과물로 탄생한 작품이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 Contents


1. 개요 : 수에즈 운하

2. 배경 : 이집트 가말 압델 나세르 집권

3. 원인 : 운하의 이권과 아스완댐 건설비용

4. 전개 : 수에즈 운하 국유화

5. 전쟁 발발 : 프랑스, 영국의 군사 대응

6. 해소 : 석유 앞에 꼬리 내린 영국과 프랑스

7. 영향 : 희망봉 항로 경제성 확보를 위한 VLCC의 등장




1. 개요 : 수에즈 운하


수에즈 운하는 유럽과 아프리카 사이에 위치한 지중해와 중동 쪽에 위치한 홍해를 연결해주는 수로 입니다. 그 지리학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이 운하는 프랑스인 페르디난드 드 레셉스가 개인 사업으로 건설한 작품 입니다. 그는 수에즈 운하회사를 설립하여 이집트로부터 운하 개발 권리를 취득한 후 10년(1859~1869년)간의 공사 끝에 운하를 완성합니다.

처음 운하가 완성된 당시는 제국주의 시대이다 보니 영국이 가장 빠른 반응을 보입니다. 수에즈 운하는 "인도로 통하는 고속도로" 라는 점을 간파한 것이죠. 영국은 수에즈 운하회사의 지분을 갖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는데, 1875년 파산 상태에 이른 이집트 통치자 케디브가 국가 소유의 수에즈 운하 주식 44%를 경매에 붙입니다.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곧바로 해당 주식을 매입합니다. 이렇게 하여 수에즈 운하는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소유물이 됩니다.

수에즈 운하는 세계대전 시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종전 후인 1948년 인도가 독립하면서 영국의 수에즈 운하를 지배하는 명분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석유 공급로의 역할은 지금까지도 건재하죠.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석유는 전세계 에너지원으로써의 지리를 확고히 다집니다. 게다가 유럽의 경우 석유 공급에 있어 중동에 의지하는 부분이 크기 때문에 수에즈 운하는 그 중요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1955년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전체 화물량의 2/3는 석유 였습니다. 유럽에서 소비되는 석유의 2/3 또한 수에즈 운하를 통해 공급되었습니다. 만약 수에즈 운하를 사용할 수 없다면, 페르시아 만에서 출발한 원유탱커는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서 유럽으로 가야하니 거리가 훨씬 멀어집니다. 해운업에 있어 톤 마일의 증가는 곧 운임의 증가를 뜻하고, 이는 곧 해당 재화의 가격 상승을 의미합니다. 수에즈 운하가 막히면 석유 가격이 오른다는 것이죠. 게다가 그 당시에는 가격은 둘째 치고 석유 수급 자체에 문제가 생기는 구조였습니다.

사진 : 수에즈 운하, 구글어스



2. 배경 : 이집트 가말 압델 나세르 집권


영국은 이집트를 75년간 지배했기 때문에 이집트 국내에서 영국을 미워하는 형태의 민족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52년, 군 간부들이 국왕 파루크를 추방하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1954년 가말 압델 나세르 대령이 쿠데타의 지도자 모하메드 나기브 장군을 축출하면서 이집트의 권력자로 집권합니다.

나세르는 이집트 내부의 권력자로 머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아랍권 세계 전체를 향해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는 범아랍주의를 주창하면서 새로운 아랍 세계의 건설, 이스라엘 제거, 중동 지역 내 유태인 축출 등을 주장했습니다. 이런 일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죠. 자연스레 수에즈 운하에 눈길이 갔습니다.

사진 : 이집트 가말 압델 나세르, 브리태니커


3. 원인 : 운하의 이권과 아스완댐 건설비용


영국은 1936년 앵글로-이집트 협약에 의해 수에즈 운하 인근에 군사 기지와 보급 센터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수에즈 운하에 대한 영국의 권리는 별도 협정에 따라 1968년까지 유효한 것으로 되어있었죠. 그런데 이집트는 영국의 철수를 부추기기 위해 영국인을 대상으로 한 사보타주를 행합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1954년, 영국의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은 더 이상 중동 지역에서 군사 기지를 유지해야할 실익이 없다고 판단, 수에즈 지대의 영국군을 20개월 이내에 철수시킨다는 내용의 교섭을 시작합니다.

약 2년간의 교섭 과정에서 수에즈 운하의 이권을 둘러싼 협상은 진전이 없었지만, 그 대신 영국과 미국은 나일 강 상류의 아스완 지역에 거대한 댐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제공하겠다며 나세르를 회유합니다. 댐 건설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영국군이 수에즈 운하에서 모두 철수하면서 나세르는 만족감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나세르가 무기 조달을 위해 소련 진영과 가까이 지내는 모습을 보이자 공산주의 진영의 확장을 우려하던 영국과 미국은 경계심을 나타냅니다. 특히 미국은 댐 건설 자금이 소련 무기 구입자금으로 일부 사용되었다는 점, 그리고 댐 건설로 인해 이집트의 면화 재배가 확대되면 미국 남부의 면제품 수출량이 감소될 것이라는 점 등을 우려했습니다.

결국 1956년 7월, 미국은 아스완 댐 건설 지원 계획을 취소합니다.



4. 전개 : 수에즈 운하 국유화


이집트의 나세르는 미국의 댐 건설 지원 취소에 분노하여 1956년 7월 수에즈 운하를 군대로 점거합니다. 이후 3개월간 외교적 타협 노력이 지속되었으나 성과는 없었고, 같은 해 9월 수에즈 운하에서 영국인과 프랑스인 선로 안내인이 철수합니다. 선로 안내인 없이 이집트인만으로 운하 운영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으나, 운하는 정상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미영프 3국은 나세르가 운하를 토해내게 해야한다는 점에는 공감했으나, 미국은 무력충돌을 막아야한다는 생각이 확고했습니다. 무력 사용의 결과 아랍 뿐 아니라 개발도상국 전체가 서방 세계의 반대편, 그러니까 소련 편에 서게 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나세르는 개발도상국가의 영웅으로 등극하게 되겠죠.

미국이 군사작전에 반대한 또 하나의 이유는 대선이었습니다. 당시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1956년 11월 대선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취임 초 한국전쟁을 종식시킨 평화의 사자로 어필했던 이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집트에서 갑자기 전쟁이 터지면 자신의 정치적 이미지가 훼손되고, 그 결과 재선에 타격이 올 것을 우려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의 생각은 미국과 달랐습니다. 겉으로는 외교적 노력을 하면서 군사 개입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 자신들의 강력했던 영향력이 아직 유효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진 :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위키피디아


5. 전쟁 발발 : 영국, 프랑스의 군사 대응


영국과 프랑스가 군사 대응을 고려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영국의 경우 수에즈 운하는 석유 공급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시설입니다. 수에즈 운하가 막혀서 원유탱커가 희망봉을 돌아오는 것은 비용도 문제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당시에는 VLCC가 생기기 전이었고, 따라서 수에즈막스급 선박으로 원유를 운반했을 것이므로 운항 단위당 수송량 측면에서 비용을 맞추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영국의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아 운송비용을 두둑히 챙겨줄 수도 없었으니 원유 수급에 상당한 차질이 생기는 사안이었던 것이죠.

영국은 2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세계 최대의 채무국으로 전락했습니다. 이 무렵 영국이 보유한 금과 달러는 기껏해야 3개월쯤 버틸 수 있는 정도였다고 하죠. 그래서 영국이 이란 등지에서 확보한 중동 석유 이권은 소중한 외환 수입이었습니다. 만약 나세르가 승리한다면 영국에 우호적인 중동 국가들까지 영향을 받아 석유 이권을 침식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알제리 등 북아프리카에서 누리는 입지에 나세르가 위협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나세르는 2년 전부터 프랑스에 대항해 독립전쟁을 시작한 알제리 반군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수에즈 운하는 프랑스의 자금으로 만든 것이니 돌려받아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래서 프랑스는 나세르에 대한 군사계획을 준비하던 이스라엘과 군사 협력 관계를 강화합니다.

1956년 10월 24일, 프랑스 파리 근교 세브레에서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주요 인사들이 모임을 가집니다. 여기서 이들 3국은 다음과 같은 작전에 합의합니다.

 1)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의 무인 지대에서 수에즈 운하로 향하는 군사행동을 전개한다.

 2)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를 향하여 운하를 지킨다는 최후통첩을 보내고 전투가 계속될 경우 양국 군대가 운하 지대에 주둔하여 수로를 지킨다.

 3) 영국과 프랑스의 목적은 운하 문제의 해결이지만, 가능하다면 나세르를 축출한다.


약속한 날짜인 10월 29일,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를 공격했고, 그 다음날인 10월 30일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를 향하여 최후통첩을 보내며 수에즈 운하 점거를 발표합니다. 10월 31일 영국 공군은 이집트 공군기지를 폭격했고, 이집트군은 시나이 반도를 거쳐 철수하기 시작합니다. 11월 5일,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와 가자 일대의 지배권을 굳히고 티란 해협을 확보합니다. 같은 날 영국과 프랑스는 운하 지대에 공습을 실시합니다.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 점거가 시작되려는 시점에 재빨리 운하를 봉쇄합니다. 바위, 시멘트, 낡은 선박 등을 수로에 침몰시켜버리죠. 같은 편이었던 시리아에서도 유럽으로 향하는 이라크 석유회사의 원유 파이프라인 펌프 시설 작업을 보이콧하여 공급을 일부 방해합니다.

이러한 전개에 미국은 깜짝 놀랍니다. 특히 선거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던 아이젠하워는 격노합니다.

영국은 수에즈 운하가 봉쇄되면 중동이 아닌, 미국의 석유를 공급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열 받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모든 석유 지원책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석유는 미국이 서유럽을 통제할 수 있는 무기였던 셈입니다.

한편, 소련은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3국의 군사행동을 비난하면서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군사 개입도 불사할 것이고, 경우에 따라 런던과 파리에 핵 공격도 취할 수 있다는 위협을 가합니다.

미국은 소련의 위협이 레드라인을 넘었다고 판단했는지 소련이 핵 공격을 감행할 경우 "파멸적인 반격을 받게 될 것이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는 것만큼 명백하다"는 성명을 보냅니다. 



6. 해소 : 석유 앞에 꼬리 내린 영국과 프랑스


11월 6일, 석유 부족을 우려한 영국과 프랑스는 현재 상태에서 전쟁을 중단하기로 합의합니다. 겨울로 접어들고 있는데 석유 재고는 7주분 뿐이고, 운하와 파이프라인이 봉쇄되면서 공급량은 전년 대비 1/4로 감소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영국과 프랑스에 금수조치를 취했고, 쿠웨이트는 태업으로 석유 공급이 멈췄는데 미국조차 공급을 끊어버리면 답이 없었던 것이죠.

영프 양국이 아직 운하의 이권을 확보하지도 못했는데 미국은 전쟁을 중단하는 정도가 아니라 운하에서 군대까지 철수시키라고 요구합니다. 아랍 세계의 분노를 사 중동 지역의 석유 공급이 중단될 가능성이 있으니 빨리 뒷수습을 하라는거죠. 또한, 만약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경제 제재를 가할 것이라는 경고를 남깁니다. 이 당시 미국, 영국, 프랑스 간의 지위가 극명히 드러나는 지점입니다.

11월 중반 들어 유엔 평화유지군이 이집트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이집트에서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석유 공급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결국 11월말, 영프 양국이 수에즈 운하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합의하면서 사태는 종료됩니다.

이집트의 나세르는 전쟁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사진 : 유엔 평화유지군, 연합뉴스


7. 영향 : 희망봉 항로 경제성 확보를 위한 VLCC의 등장


1957년 4월, 수에즈 운하가 정상 가동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석유 공급 수단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었습니다. 전쟁 과정에서 시리아가 파이프라인 가동을 방해한 일도 생겼으니 석유의 공급에 유일한 해결책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셈입니다.

1956년 수에즈 운하의 문제점을 논하던 당시에는 페르시아 만에서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유럽으로 향하는 항로를 제대로 논의하지 않았었습니다. 이 방안이 경제성을 가지려면 초대형 탱커가 필요했는데, 기술적으로 그런 선박을 만드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본 조선소들은 디젤엔진 개선과 더 강화된 후판을 사용하여 초대형 탱커를, 그것도 빠른 속도로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이제 VLCC가 시장에 나타났습니다. 이로써 유조선에 대한 정치적 위험은 상당 부분 감소하게 됩니다.

한편, 영국과 미국은 1957년 버뮤다 회담에서 석유 공급의 안정성을 위하여 쿠웨이트와 페르시아 만 국가들의 독립이 필요하다는 점을 확인합니다. 걸프 만의 안전이 석유 공급 안정성의 전제 조건이었던 겁니다.

사진 : 현대중공업 VLCC, 조선비즈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저 때 당시의 일을 비교해보면, VLCC를 통한 희망봉 항로 이용 여부가 결정적인 차이점으로 보입니다. 1950년대 당시에 VLCC가 널리 퍼져있었다면 아마도 영국과 프랑스도 굴욕을 당하지 않았겠지요.

일본 조선소에서 건조를 시작한 VLCC는 한국을 거쳐 이제 중국으로 일감이 많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은 서로 패권을 다투는 사이가 되었는데,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이 VLCC를 독식하면 정치적 위험이 커지지 않을까요? 올해 미국이 조선업에 있어 대중국 제재안으로 무엇을 들고 나올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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