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생존자의 이야기; 죽음의 수용소에서 |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등의 절멸 수용소에서 생존한 저자가 본인의 경험과 생각을 담백하게 정리한 책입니다. 극한의 환경 속에서도 저자는 자신의 정신을 유지하였고, 그 과정에서 삶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타인의 마음에도 파문을 일으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의 생존률은 대략 5%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소수의 생존자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읽어나가며 저의 내면에도 깊은 울림이 생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나의 자유로 올바른 삶을 선택해야 한다


수용소에서 모든 것을 빼앗긴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도 인간에게는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가 어떻게 행동할 지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남아있습니다. 극한의 상황이라 할 지라도 이타적인 사람이 될 지, 아니면 이기적인 사람이 될 지는 자기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강제수용소에 있었던 우리들은 수용소에도 막사를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거나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아주 극소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도 다음과 같은 진리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은 수용소 안에서 누군가는 성자가 되고, 누군가는 혐오스러운 괴물이 됩니다. 자신이 가진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집니다. 학교, 군대, 회사 등 모든 사회에서 힘든 여건을 잘 헤쳐나가려는 사람이 있는 반면 불평 불만 속에 삶을 소모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수용소에서 나타나는 장면들은 그러한 경향성의 극한인 것으로 보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다.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내가 힘든 상황에 놓여있다면  1. 징징거리고 싶은 마음을 버리고,  2. 이 상황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본 후 대응 방향을 스스로 설정해야 하고,  3. 이를 기회로 더 좋은 내가 되어야겠다는 마음과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사실 당연한 내용이지만 이 책을 통해 이러한 마인드 세팅이 가진 힘이 어느 정도까지 커질 수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힘들 때마다 되새겨야겠습니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말하자면 한쪽 극에는 실현되어야 할 의미가, 그리고 다른 극에는 그 의미를 실현시켜야 할 인간이 있는 자기장 안의 실존적 역동성이다.

이것이 정상적인 상황에서만 유효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신경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더 효력이 있다. 낡은 아치를 튼튼하게 할 때, 건축가는 오히려 아치에 얹히는 하중을 늘린다. 그래야만 아치를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들이 서로 잘 밀착되기 때문이다.


| 세상이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줘야 할 이유는 없다


수용소에서 세상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세상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고, 내가 기대하던 것은 사라지거나 애초에 없었으며, 나의 힘든 상황이 끝난 것도 아니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수용의 과정은 슬픔, 좌절, 분노 등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저자 또한 수용소에서 나와보니 아내를 비롯한 대부분의 가족이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냉정하고 잔인한 운명인 것 같지만, 사실 이러한 비통함과 환멸은 자신의 일방적인 기대가 낳은 결과일 뿐입니다. 나의 기대가 충족될 것이라는 보장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힘든 상황을 겪었고 그것을 가까스로 헤쳐나왔다고 한 들 세상이 내게 관심을 가져줘야할 이유는 없습니다. 내가 원했다는 이유 만으로 세상이 그걸 해줘야할 이유도 없지요.

내가 무엇인가를 해나감에 있어 일종의 상거래를 한 게 아니라면, 결과에 대한 기대를 갖지 말아야 합니다. 내 의지로 내가 선택한 일이었을 뿐 거기서 비롯되는 결과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말이 쉽지 이걸 곧장 받아들이기는 어렵지요...


정신적 억압에서 갑자기 풀려나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의 성격에 손상을 입힐 수 있는 두 가지 기본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을 때 겪게 되는 비통함과 환멸이다.

비통함은 그가 살던 마을로 돌아왔을 때 그가 부딪치게 되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향에 돌아왔을 때,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보면 그저 어깨를 으쓱하거나 상투적인 인사치레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면 그는 점점 비통해지면서 자기가 과연 무엇 때문에 그 모든 고통을 겪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거의 모든 곳에서 똑같은 말을 듣는다. "우리는 그것을 몰랐어요." 그리고 "우리도 똑같이 고통을 받았어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저 사람들은 정말로 나에게 할 말이 없는 것일까?"

환멸을 경험하는 것은 이와는 또 다른 문제다. 여기서 그가 환멸을 느끼는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토록 잔인해 보이는 운명 그 자체이다. 몇 년 동안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시련과 고난의 절대적인 한계까지 가보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직도 시련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시련에는 끝이 없으며, 앞으로도 더 많은 시련을, 더 혹독하게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내가 앞에서 수용소에 있는 사람에게 정신적으로 용기를 주려고 할 때, 그가 미래에 기대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얘기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나는 삶이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고, '사람'이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그렇지만 정작 자유를 얻은 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어떤 사람은 자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슬프다! 수용소에서는 그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용기를 주었던 그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여! 슬프다! 마침내 자유가 실현되었을 때, 모든 것이 자기가 꿈꾸어오던 것과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여! 어쩌면 그는 전차를 타고, 몇 년 동안 마음속에 그리던 집으로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꿈 속에서 수천 번 되풀이했던 것처럼 벨을 눌렀을 것이다. 그러나 문을 열어 주어야 할 그 사람은 그곳에 없었다. 아니, 앞으로도 계속 없을 것이다.


| 선택을 할 때는 운의 힘을 감안해야 한다

수용소 안에서는 생사를 좌우하는 선택의 순간이 끝없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수용소를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을 때도 그렇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해야 하나?(내게 그럴 수 있는 에너지가 남아있나?) 아니면 연합군이 해방시켜주길 기다려야하나?(그 때까지 내가 살아있을까?) 이런 종류의 선택인 거죠.

가만히 기다렸으면 살았을텐데 탈출을 기도하다가 죽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사후적으로나 할 수 있는 얘기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당연히 생길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택을 함에 있어 "운"의 힘을 감안해야 한다는 겁니다. "운"의 힘은 내게 행운으로도, 또는 불운으로도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을 할 때는 불운만 감안하면 됩니다. 행운은 '+알파'로 받아들이면 그만이지만, 불운은 나의 앞날을 뒤흔들 수 있으니까요. 책에서는 불운에 관한 우화가 등장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죽음의 신이 하는 얘기가 숙명론이 아니라 불운을 위트있게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테헤란에서의 죽음

한 돈 많고 권력 있는 페르시아 사람이 어느 날 하인과 함께 자기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하인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면서 방금 죽음의 신을 보았다고 했다. 죽음의 신이 자기를 데려가겠다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하인은 주인에게 말 중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말을 빌려달라고 애원했다. 그 말을 타고 오늘 밤 안으로 갈 수 있는 테헤란으로 도망을 치겠다는 것이었다. 주인은 승낙을 했다.

하인은 허겁지겁 말을 타고 떠났다. 주인이 발길을 돌려 자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죽음의 신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자 주인은 죽음의 신에게 물었다.

"왜 그대는 내 하인을 겁주고 위협했는가?"

그러자 죽음의 신이 대답했다.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늘밤 그를 테헤란에서 만나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그가 아직 여기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표시했을 뿐이지요."


| 가망 없는 투쟁도 삶의 존엄성과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는다

생존의 가능성이 사실상 없지만 죽을 수도 없는 상황이라면, 지금부터 죽음의 순간까지 그저 버티고 있는 이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저자는 고통과 임종, 궁핍과 죽음까지 삶의 의미 속으로 가져옵니다. 인간의 삶은 마지막에 이를 때까지 의미를 가지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나는 과거로 흘러간 경험들로 채워져있는 존재라는 겁니다.

지금의 시간, 언젠가는 다가올 내 마지막 시간까지도 그 때가 지나가면 과거가 됩니다. 그 순간의 경험들도 과거로 흘러가 나의 일부가 되어 존재를 입증할 것입니다. 가망이 있느냐 없느냐가 여기에 영향을 주진 않습니다.

의연하게 시련에 맞서고 올바른 마음과 태도로 삶을 살아간다면 나의 과거는 긍정적이고 충만한 경험들로 채워질 것이고, 그게 바로 내가 될 것입니다. 세상에 내 삶의 존엄성과 의미를 이렇게 남기고 싶습니다.


하루 종일 꼬박 굶어야 했던 그날 저녁, 우리는 막사에 누워있었다. 분위기가 착 가라앉은 상태였다. 몇 마디 말이 오갔을 뿐이고 한마디 말조차도 신경에 거슬렸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불이 나가버렸다. 기분이 완전히 바닥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 고참 관리인은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이 머리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이야기를 입밖에 냈다. 그는 지난 며칠 동안 병이나 자살로 죽어간 수많은 동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그 죽음의 진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것은 바로 희망을 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앞으로 생길지도 모를 희생자들이 이런 최악의 상태에 이르지 않도록 어떤 방법이 강구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나라고 했다.

신은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시 나는 정신의학에 대해 설명하거나 설교를 하고 싶은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는 것을. 동료들을 상대로 정신과적 치료를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춥고, 배고프고, 짜증스럽고, 피곤했다. 하지만 나는 노력해야 했다. 좀처럼 생기지 않는 이런 기회를 활용해야만 했다. 그 어느 때보다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 절실한 때였기 때문이다.

나는 단순한 위로의 말부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여섯번째 겨울을 맞지만 지금 유럽의 정세를 살펴보면 우리 처지가 그렇게 최악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시련을 겪어오면서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을 잃은 적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나는 의외로 그들이 대체할 수 없는 것을 잃어버린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들은 희망의 이유를 갖고 있었다. 건강, 가족, 행복, 전문적인 능력, 재산, 사회적 지위 -  이것은 모두 나중에 다시 가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 때 나는 니체의 말을 인용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미래에 대해 얘기했다. 공정하게 얘기해서 미래가 가망 없어 보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살아남을 가능성이 얼마나 적은지에 대해서도 모두 생각을 같이 했다. 우리 수용소에는 아직 발진티푸스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는 내가 살아남을 확률을 20명 중의 한 명으로 점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희망을 잃거나 포기할 의사가 없다는 얘기를 그들에게 들려 주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심지어 바로 한 시간 후도 내다볼 수 없기 때문에. 며칠 안에 전쟁 상황에 엄청난 반전이 일어날 것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적어도 각 개인에게는 얼마나 엄청난 기회가, 그것도 아주 갑자기 찾아오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작업환경이 좋은 특별 작업반에 배치된다거나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일들이 당시 수감자들에게 바로 '행운' 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일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미래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 미래에 드리워져 있는 장막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또한 나는 과거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과거에 있었던 그 모든 즐거운 일들과, 그 빛이 현재의 어둠 속에서도 얼마나 밝게 빛나고 있는지를. 이 때 나는 시를 인용했다. 내 스스로 설교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대의 경험, 이 세상 어떤 권력자도 빼앗지 못하리!"

경험뿐이 아니다. 우리가 그동안 했던 모든 일, 우리가 했을지도 모르는 훌륭한 생각들, 그리고 우리가 겪었던 고통, 이 모든 것들은 비록 과거로 흘러갔지만 결코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존재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간직해 왔다는 것도 하나의 존재방식일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가장 확실한 존재방식인지도 모른다.

그런 다음 나는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에 대해 얘기했다. 나는 내 동료를 향해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의 삶은 의미를 갖는 일을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삶의 무한한 의미에는 고통과 임종, 궁핍과 죽음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말을 했다. 어둠 속에서 내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기고 있는 불쌍한 이들에게 우리가 처한 가혹한 현실에 과감하게 직면하자고 했다.

희망을 잃어서는 안되고, 우리들의 가망 없는 싸움이 삶의 존엄성과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확신 속에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누군가가 - 친구나 아내, 산 사람 혹은 죽은 사람, 혹은 하느님 - 각각 다른 시간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했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그 사람은 우리가 자기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의연하고 비굴하지 않게 시련을 이겨내고, 어떤 태도로 죽어야 하는지를 알기를 바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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